필리핀에 온 지 6개월이 훌쩍 지났네요. 봄꽃이 떨어지고 여름의 더위가 시작될 즈음 한국을 떠나 마닐라에 도착했을 때 숨이 헉 막히는 더위에 훗날 입이
쩍 벌어질 전기세 고지서를 알지 못한채 에어컨을 켠 방에서 나가지 못하던 날들을 보내며 내가 여기서 뭘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새 저희 가족은 각자 자신의 자리를 찾아 새로운 날씨와 환경과 주어진 일들에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저희 부부의 중심 사역지인 International
Graduate School of Leadership과 진규와 현규가 다니는 선교사 자녀학교
Faith Academy가 서로 다른 도시에 위치하고, 워낙에 마닐라 근교의 교통체증이
심각한 상태라 아이들은 매일 새벽 5시 50분에 집을 나섭니다. 정규 수업을 마치고 운동과 특별활동까지 하고 돌아오면 하교길 트래픽에 막혀 저녁 7시가 되어야 집에 옵니다. 우기철엔 무섭게 쏟아지는 비로 길이 물에
잠기는 날들도 몇 번 있었는데, 그 때에는 저녁 9시가 되어서
온 적도 있답니다. 집에 와서 배고프다며 허겁지겁 저녁을 먹고, 겨우겨우
숙제하고 쓰러지듯 잠자리에 들고… 한국생활 4년만에 영어를 많이 잊어버린 아이들이 다시 영어로 공부하는 것도 쉽지 않고… 이렇게 빠듯한 스케줄로 늘 바쁘고 피곤한 날들을 보내지만,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도 사귀고 성적중심의 한국학교와는 다른 여러가지 다양한 활동들을 하면서 학교 생활을 즐겁게
하고 있는 진규와 현규가 기특하고, 이 아이들을 위한 많은 기도들에 감사할 뿐입니다.
제가 처음 선교에 눈을 뜨고 선교사로 헌신할 때, 저에게 부담으로
다가온 사명이 있었습니다. 특별한 부르심에 순종하고 헌신하는 선교사 부모님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상처를
받으며 자라는 선교사 자녀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고, 어린이 사역에 헌신한 저는 MK 사역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직접적인 MK 사역은 아니더라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MK사역에 동참하면서 늘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규와 현규를 키우면서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녀양육에 대해 늘
고민하고,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의 헌신을 따라 바뀌는 환경에 적응하며 잘 해보려 애쓰는 MK들의 고충과 상처를 이해하며 삐뚤어지지 않게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제 안의 연약함과 미성숙함이 아이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를 위해 주님의 간섭과 도우심을 늘 간구합니다. 어디선가 듯고 제가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손자/손녀가 없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부모의 신앙으로 저절로 하나님의 손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천국티켓은 단체티켓이 없다.”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에서만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많은
선교사/사역자들의 자녀들이 부모의 신앙을 이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받은 채로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소명을 찾아 사역으로 바쁜 부모님들과의 관계가 어려워지거나, 늘 넉넉치 못한 재정으로 힘들게 사는 부모들을 보며 물질에 기준을 두고 세상으로 향하는 그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진규와 현규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처음 필리핀에 와서 학교에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3개월 가까이
쉬면서, 아이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진규가
한국에서 적응하지 못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었는지, 현규가 새로운 곳에서 또다시 시작하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은 저도 남편도 오랜만에 돌아온 낯선 모국에서 각자
살아내느라 힘들어, 겉으로는 별탈 없이 지내던 아이들이 내면으로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살피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아이들에게도 잘 버텨줘서 고맙다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지금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학교입니다. 가르치는 모두 교사들도 보수를 받지 않는
MK 사역에 헌신한 선교사들이시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타문화권에서 선교를 하는 부모를 따라
모국을 떠난 MK 들입니다. 현지인들을 위한 사역이 아닌 MK 학교의 교사로서 헌신하는 분들이 후원을 모으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봅니다. 저희들도 신학교에서 교수사역을 한다고 하면 보수를 받는 줄로 생각하셔서 물질후원을 모으는 것이 무척 어렵더라구요. 선교를 오지에서 고생하며 현지인들을 위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열방에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세우는 일은 여러모양으로 헌신한 다양한 섬김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항아리 애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저희들의 사역을 통해 주의 제자들이 세워지고 이로 인해 주의
교회들이 세워짐을 감사하며, 진규와 현규가 부모가 선교사임을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는 가정으로 세워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항아리 독자들께 MK사역을
하시는 모든 분들을 기억하시고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